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는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랍니다. 이오스 13세(재위: 기원전 51~47년)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재위: 기원전 47~44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파라오 자리에서 일시 물러났습니다. 이 일로 클레오파트라는 본인을 그리스인의 후손이 아닌 토착 이집트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후에 로마 제국을 이용해 그리스계 헬레니즘 왕국들을 침략하게 되는 계기가 된답니다.
아울러 기원전 48년 10월, 클레오파트라 7세는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이집트에 온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협상하였답니다.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하였답니다. 기원전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답니다.
아울러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기원전 42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동하였으며 3년 후 결혼하였답니다. 그런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과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습니다. 즉,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각각 손위처남과 매제 사이였답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끝내 아내를 버리고 그녀와 연인이 되었답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와의 사이가 급격히 멀어지고, 그가 복수를 다짐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재혼 후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의 권력투쟁을 경제적으로 도운 대가로 페니키아, 유다 등의 쓸모 있는 영토를 할양받아 확장하였습니다.
권력구조의 변화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와의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31년 9월 2일 명분상 자신에게 선전포고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답니다. 그렇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용감한 토착 이집트 여인이 아닌 나약한 그리스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클레오파트라는 깊은 절망감에 시달려 39세의 나이로 죽었답니다.